전통시대의 천문학은 국가천문학이고, 그 일부인 역법은 기본적으로 천체가 운행하는 방식을 이해해 기술하며 연월일시 시간규범을 만들어 역서와 보시체계를 통해 백성에게 알려주는 것이 목표이다. 세종시대는 수시력 체계를 중심으로 역산의 이론적 지식과 이것을 적용하기 위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 민본 정책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달했지만, 그 후 계승되지 못했다. 세종대 과학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세종시대에는 천문학이 발달했고, 그 이후의 시대에는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평가는 완전히 합의하고 있다. 쇠퇴가 아니라 계승이다. 전통시대에 천문학은 하늘을 관측하고, 천체현상을 예측하며, 시간규범을 수립하고 반포하는 것이 천문학의 목표이다. 특히 역법은 천문학자의 지적 탐구를 위한 지식이 아니라 시간규범의 반포와 천체현상의 예보라는 실행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칠정산내외편, 교식가령, 그리고 세조 4년(1458)에 편찬된 교식추보법 같은 책은 실행적 차원의 지식과 활동에 기여하는 실용성인 점을 내용을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는데 "A라는 값을 구하려면 B라는 수치와 C라는 수치를 곱하여 D로 나눈 다음 E를 더해 F값과 비교하여 서로의 차이 값을 따진다"는 식의 서술이다. 이들 책은 역서를 만들고 시각을 측정하고 알리며 교식을 예측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계산의 방법과 순서를 알려주는 교본 같은 것이다. 세종 16년 이후의 역산서들은 이미 확립된 이론적 차원의 역산학을 실행하기 위한 정식화이자 규범화인 것이다. 이후 이와 같은 효과적인 교본들을 갖게 되자, 세종대 이후의 역산학은 거의 모두 실행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 천문관원들의 모든 활동은 확립된 교본을 통해 역서를 제작하고 시각을 측정하고 알리며 교식을 예측하는 이른바 지식의 적용과 실천에만 집중되었다. 조선 천문관원들은 17세기 초까지 동일한 수준의 실행적 차원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들은 수시력, 대통력, 회회력, 경오원력, 중수대명력 등의 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을 실행의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훌륭한 교본들을 세종대 이후부터 확보하고 있었고, 이것을 이용하여 역서를 제작하고 시각을 측정하고 알리며 교식을 예보하는 일 조선이라는 국가가 천문학과 천문학자에게 기대하는 요구를 잘 충족하였다. 다양한 요인들로 세종시대에는 역산학에서 이론적 차원과 실행적 차원의 지식과 활동이 동시에 필요했다.
일본에서 1684년부터 사용한 시부카와 하루미의 정향력이 조선 유학자 박안기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박안기는 1643년 (인조21)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오카노이 겐테이에게 수시력을 전수해 주었고 시부카와가 다시 오카노이에게서 배워 정향력을 만들 수 있었다. 이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에 의해 수립되는 시간 규범과 교식 계산이 오차를 드러내는 인조 때에도 조선 유학자가 일본인에게 수시력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수준에 있었다는 것은 세종대 확보된 역산학 지식이 17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출처] 한국 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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